
<자전거 여행2>의 시작은 김훈이 다시 자전거를 타게 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전작인 <자전거 여행>과는 시간의 간극이 크다. 그러나 <자전거여행2>는 전작과 이어진다. <자전거여행>이 조강에서 끝났다면, <자전거여행2>는 조강의 붉게 타오르는 노을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작과 비교한다면 전작보다 훨씬 짜임새가 있게 구성되어 있다. 전작은 그냥 잡다한 기행문을 엮어놓았다면 이번 책은 뚜렷한 방향과 흐름이 있다.

일단, <자전거 여행>에는 없던 지도가 등장했다. 그리고, 글속에는 지도에 보이는 길과 보이지 않는 길의 흐름을 따라 자전거가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기도 지역에 사는 사람은, 이 책을 참고로 자전거 여행을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이 책에는 코펜하겐 휠과 아이폰이 줄 수 없는 인문학적 지식과 감성이 담겨있다. 사실, 나는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지만 여행을 가다보면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상상한 것처럼 풍경이 나에게 아무런 말을 건네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는 이곳을 먼저 다녀갔던 사람의 글을 읽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 글속에는 풍경을 바라보는 방법과 풍경에게 말을 건네는 방법이 담겨 있다.

남양만 갯벌이 사라져가는 풍경을 예로 들어보자. 남양만 갯벌은 지금 사라지고 없다. 화옹방조제가 건설되고 나서, 남양만 갯벌이 말라버렸기 때문이다. 김훈이 자전거를 타고 갔던 2004년도에 이미 말랐기 때문에 지금쯤은 완전히 육지화 되었을 것이다. 이 텅빈 풍경을 여행자는 과연 무엇을 느낄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보통 사람은 대부분 지나치고 말 풍경들이다. 그러나 김훈은 이 풍경에 대해 글을 남겼다. 20페이지가 넘는 본문을 모두 보여줄 수는 없고, 일부만 발췌한다.
이 말라가는 갯벌은 인공과 자연, 연속과 단절, 물과 땅 사이에 끼여서 바래어지는 시간의 풍경을 보여준다. 드러난 바다의 속살이 낮은 언덕과 고랑으로 끝없이 출렁거리면서 지평선에 닿는데, 언덕은 이내 말라서 허연 소금을 뒤집어 썼고, 고랑은 때때로 비에 젖어 아직도 습하다. 이 마른 갯벌의 한가운데 서면 언덕과 고랑은 전방위로 퍼져나가고 먼 언덕들이 소금기를 몰아가는 바람에 흔들려 시선은 자주 어지럼증을 일으킨다. 다시 시선을 수습해서 먼 곳을 바라보면 언덕과 고랑들은 불쑥불쑥 마구잡이로 그 마른 갯벌에 들어선 것이 아니라, 고랑들은 길게 굽이치고 휘어지면서 이어져나가고 언덕들이 그 언저리를 따라가며 솟고 또 잦는 것이어서 언덕과 고랑은 물의 흐름과 시간의 흐름에 실리는 계통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고랑과 언덕의 무수한 계통들은 마른 갯벌을 가득 채우며 합쳐지고 또 갈라지면서 더 큰 계통을 이루며 이제는 막혀버린 바다 쪽으로 나아가는데, 그 먼쪽은 저녁의 어스름 속으로 풀어지면서 언어의 추격권을 벗어나고 있다. 언어는 갯벌에 주저앉아 마땅했다. 바다의 속살 위로 자전거를 몰아가는 이 마른 갯벌의 낯선 풍경은 시간의 작용과 공간의 작용이 합쳐져서 이루어져내는 생성과 소멸이었고 지속과 전환이었는데, 시간과 공간은 바닷물 밑에서 만나 시간도 아니고 공간도 아닌 세상을 열어내고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처음으로 바다와 갯벌을 보았다. 그 전에는 바다와 갯벌에 대한 경험적 지식이 전혀 없었다. 그때도 갯벌인 줄 모르고 갯벌에 뛰어 들었다. 육지인 줄 알고, 들어갔는데 몸이 빨려 들어갔다. 갯벌은 바다도 육지도 아닌 곳이었다. 그리고 갯벌은 살아있었다. 바닷물을 마시고 사는 생명. 갯벌은 바닷물이 막히는 순간 죽음을 맞이한다. 바닷물이 사라진 곳은 갯벌은 먼지가 풀풀 날리는 삭막한 땅으로 변한다. 그곳에는 인공과 자연, 연속과 단절, 물과 땅 사이에 끼여서 바래어지는 시간의 풍경들만이 남아있다. 김훈의 글을 읽으면 우리는 사라진 갯벌을 보고, 그 풍경을 제대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아래 사진은 장덕수로의 모습이다. 사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다.
장덕 수로는 남양만 갯벌을 동서로 길게 흐르면서 이 갯벌의 마지막 날들을 적셔주고 있다.
갯고랑은 아직 살아있는 것들을 물가로 불러 모으고,
아직 떠나지 않은 새와 게와 풀들은 이 물가에 모여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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