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눈물(제임스 엘킨스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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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눈물

제임스 엘킨스 지음 | 정지인 옮김
아트북스 2007.12.19
평점


잃어버린 눈물 찾기



그림 앞에서 울어본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

왜 사람들은 그림 앞에서 울지 않는 것일까?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부제목 때문이었다. 그림 앞에서 울어본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 나는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나는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고 우는 사람을 본 적도 없었던 까닭도 있겠고, 그림 앞에서 우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마치 한번도 본 적 없는 생소한 단어 때문에 전체 글이 해석이 되지 않는 것처럼 나는 이 책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잘 울지 않는 성격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나처럼 납득하기 힘들어하는 독자의 이해를 위해서인지 이 책은 로스코의 그림에서 시작한다. 로스코의 그림은 내가 고등학교 때 시인 최영미의 여행 수필집에서 처음 접했는데, 그 때 느낌은 우울 그 자체였다. 온 통 검붉은 색채들이 내 숨을 틀어막을 듯한 느낌이었다. 이 그림이라면 충분히 울 수 있는 사람이 있을성도 싶었다. 이 책은 저자에게 쓴 여러 사람들의 글이 인용되어 있는데, 실제로 로스코의 그림을 보고 울었다는 내용이 소개 되어있다. 로스코는 실제로 자신의 그림이 많은 사람을 울게 하기를 바랬던 모양이다. 1957년 마크 로스코와의 인터뷰에서 로스코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들을 표현하는 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비극이나 무아경, 파멸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내 그림 앞에 설 때 힘없이 무너지고 눈물을 흘린다는 사실은 내가 그 기본적인 감정들을 전달했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저자는 로스코가 의도를 직접 드러낸 것이 경솔하였다고 말하지만, 한편으로 로스코를 통하여 현대 미술에도 그림이 관중을 울릴 수 있음을 입증할 수 있었다.
현대의 미술사학자나 관중들은 그림을 보고 잘 울 수 없는데 그것은 그림을 평가하는 일은 매우 지적인 작업이라는 편견 때문이다. 그런 까닭으로 지식이 없으면 판단 자체를 하지 못하게 되고, 지식이 많더라도 주관적인 판단을 개입하지 않으려 한다. 현대의 관중이나 전문가들은 그림을 자유롭게 바라보지 못한다. 따라서 그림을 사적인 체험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치 의사가 환자를 대하듯이 객관적으로 그림을 대하게 됨으로써 관중은 그림에 빠져들지 못한다. 그리하여 눈물이 말라버리게 된 것이다.
유럽에서는 눈물이 유행이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18세기인데, 예를 들어 음악회에서 음악이 끝나면 박수를 치는 것이 아니라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소설이나 회화에서는 감상자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기 위한 기교들이 지나쳐서 일상적으로 되어 버려, 이후에는 감상자로 하여금 전과 같은 반응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다음 그림은 18세기 그뢰즈의 작품으로 그림속에 등장하는 죽은 새는 마치 오페라에서 죽음을 맞이한 영웅처럼 누워있다. 소녀는 너무 많이 울어서인지 볼이 빨갛게 달궈져 있고, 한 손으로는 얼굴을 가리고 있다. 지금 이 그림을 보고 그림 속 소녀와 같은 슬픔을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까닭은 이 그림은 너무나 인위적인 느낌이 들어서 일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이 그려졌을 당시에는 실제로 우는 관중들이 많았다고 한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도 현대 미술에서 눈물을 말라버리게 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이 두 흐름은 예술을 지적인 작업으로 만들었고, 감성보다는 지성으로 작품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이 책은 9장과 10장에서 종교화를 다룬다. 저자가 책의 거의 끝부분에 종교화를 다룬 이유는 종교에 대해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현대의 많은 지식인들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처음부터 종교화가 나오면 종교적인 책이 아닌가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도 만약에 종교화가 나왔다면 이 책을 끝까지 읽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미술사에서 종교화를 빼놓는다면 한국 음식에서 김치를 빼놓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리스 시대 이후 서양의 미술사는 기독교를 위한 그림에서 출발하였다. 이 책에서 다뤄지는 것은 중세와 르네상스의 회화인데, 특히 중세말과 르네상스 초기의 회화에는 예배자들을 회개로 이끄는 눈물 흘리는 인물들이 자주 등장했다. 이른바 안다호츠빌트, 기도용 성상이다.


 다음 그림은 바우츠의 「울고 있는 마돈나」로 안다호츠빌트이다. 안다호츠빌트에 대해, 대체로 학자들은 이 그림의 핵심요소는 감정이입을 부추기기기 위한 시각적 재현의 중요성이다라는 식으로 말할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림의 이런 요소가 모든 것을 초월하여 현대에서도 여전히 관중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는 자신의 지극히 개인적인 일화를 이야기 한다. 자신이 바우츠의 「울고 있는 마돈나」를 사랑하게 된 것은 자신의 제자인 리사가 이 작품을 모사하게 되면 서 부터였다. 그녀는 군중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이젤을
세워둔 채 몇 주 동안 이 그림을 모사한다. 저자도 제자의 작업을 옆에서 조언도 해주고 모사한 그림에 대해서 의논도 한다. 저자가 이 그림에 감동하게 된 것은 이 그림이 주는 감동적 요소와 개인적 체험과 이 그림에 대해 오랜 시간동안 노력을 기울이며 생각해서였던 것 같다.



책의 마지막 11장과 12장에서는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작품을 소개하는데, 나는 이 그림에 대한 어떤 논평도 염두하지 않고 감상하였다. 이 그림들의 주제는 텅빔, 고독, 쓸쓸함이다. 나는 이 그림들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이 쓰여진 목적은 그림을 감상할 때, 배경지식이 주는 정보에 그치지 말고 자신만의 눈으로 감상해야 한다는 것을 독자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데 있다고 하겠다. 우리가 왜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려야 하는지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저자가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하고 전문가들까지 설득하려면 책이 이 정도 길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저자는 책의 끝인 「나오는 글」에서 8가지 그림 감상법을 제시한다. 참고할 만한 이야기인 것 같다.

1. 미술관에는 혼자가라.
2. 모든 것을 보려고 노력하지 마라.
3. 집중력 분산을 최소화하라.
4.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라.
5. 완전한 주의를 기울여라.
6. 스스로 생각하라.
7. 진정으로 보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보라(대충 훑어보는 사람 말고, 한 그림에 비정상적으로 오랫동안 서 있는 사람은 그림을 진정으로 보고 있는 사람이다.).
8. 충실하라(일단 그림 한점과 시간을 보내고 나면 다시 보러 오겠다고 자신과 약속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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